경제학이나 경영학을 공부하다보면 'stock'이란 용어와 'flow'라는 용어가 나옵니다. 대충 따져서 stock은 어떤 한 시점에 정해지는 실재량 같은 거고요, flow는 어떤 기간 동안에 결정되는 변화량 같은 거지요. 예를 들어, 은행잔고는 stock이고 주식수익은 flow이지요.
그런데 이 개념이 상당히 혼동됩니다. 일상생활에서도 혼동되어 사용되고 학문적으로 접근할 때도 혼동이 존재합니다. 일상에서의 혼동이야 뭐 그냥 말하는 자와 듣는 자 모두 대충 대충 잘못 이해하고서도 어찌어찌 넘어가겠지만 학문적인 영역에서는 곤란하겠죠.
처음부터 돈에 관련된 쉬운 예를 들었으니 계속해서 '돈'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문장을 생각해봅시다. "지금 우리집에 있는 돈이 얼마인가?" 하는 것과 "오늘 가게에서 번 돈이 얼마인가?" 하는 것. 이 두 문장 안에서 사용된 '돈'이라는 단어의 뜻이 같은 걸까요? 엄밀히 따지자면 자본이라는 stock과 수익이라는 flow로 서로 다른 범주의 개념을 갖고 있습니다.
여담이지만 다른 예로, 저의 현재 회사가 의류제조업체나 도매업체를 손님으로 하고 있는데 제가 그 고객회사들의 자원관리(ERP) 소프트웨어를 개발해주고 있습니다. 인보이스도 다루니까 돈 흐름도 따지긴 하지만 그보다는 재고(인벤토리) 쪽 따지는 게 좀 복잡합니다. 그래서 고객들이 요구하는 리포트 중에 stock과 flow를 헷갈리는 게 많지요. 예를 들어 어느 날의 베스트셀러를 뽑아달라 원하지만 이건 flow 개념이라 언제부터라는 기간 설정 없이는 계산할 수가 없다는 게 문젭니다.
이런 식의 의미 혼란이 불교에서의 '나'란 표현에도 존재하는 듯 합니다. stock과 flow의 관계랑 동일하다는 말은 아니고 마치 그것처럼 비슷하게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는 걸 인정하고 구별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고정된 실체(stock)로서의 '나'와 계속 변하면서 유지(flow)되는 '나'가 다른 의미의 같은 표현으로 경전 내에 병존한다는 말이지요.
심하게 무리해서(?) 간단히 말하자면, 무아론의 '나'는 stock이고 윤회론의 '나'는 flow입니다. 부처님 말씀 중에 "나도 없고, 나의 것도 없고, 나의 나(주체)도 없다" 라는 식의 표현이 있는데, 여기서의 '나'는 stock으로 그런 고정된 실체로서의 '나'가 없다는 말씀으로 해석이 됩니다. 반면 십이연기로 윤회하는 입장에서의 '나'는 flow로, 끊임없이 변화를 계속하되 남과 구분되어 유지되면서 결국엔 '나'의 선택과 의지로 십이연기를 끊어야 하는 '나'의 정체가 있는 거라 해석할 수 있고요.
이런 2가지 혹은 그 이상의 다른 개념들로 '나'를 대입하여 불경을 다시 읽어보거나 명상할 때 돌아본다면 어떨까요? 빛의 이중성(입자냐 파동이냐)을 비유의 재료로 들 수도 있었지만 그보단 '돈'의 이중성에 대한 비유가 '나'라는 개념의 혼란과 더 가까워 보인다는 게 제 생각이네요. 하지만 어차피 비유일 뿐, 제가 여기서 소위 "답정너" 식의 주장을 하는 건 아닙니다. 그냥 재밌는 화두꺼리 하나로 봐주시죠.
글을 마치기 전에 뽀~너스로 혼란스러운 말장난 하나 또 던지겠습니다. "색 = 현상 = flow" 이고, "공 = 실체없음 = not stock" 입니다. 고로 색즉시공이란 "flow is not stock"입니다. 엄청 당연한 말이 나왔는데 혹시라도 어디서 논리가 잘못 됐을까요? ㅎㅎ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