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누구를 유혹하는가'

옛말에 탐화봉접(探花蜂蝶)이라 했다. 꽃을 찾아다니는 벌과 나비. 이 말은 오래도록 여색을 좇아 이곳저곳 기웃거리는 사내를 나무라는 뜻으로 쓰였다. 탐하는 자는 벌이고, 탐해지는 것은 꽃이다.
문장의 주어는 언제나 벌이었다. 그런데 식물학의 눈으로 이 장면을 다시 보면, 주어가 통째로 뒤집힌다. 화탐봉접(花探蜂蝶). 꽃이 벌과 나비를 찾는다. 한문 어법으로는 성립하지 않는 문장이다. 探花는 “꽃을 찾다”이니 벌이 주어여야 하고, 花探이라 쓰면 어순이 어그러진다. 그러나 이치로 따지자면 이쪽이 옳다. 어법을 어겨야 비로소 진실에 닿는 문장이 있다.
꽃은 탐해지는 쪽이 아니다. 부르는 쪽이다. 꽃잎의 빛깔, 향기, 꿀샘의 위치, 심지어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고 곤충의 자외선 시야에만 드러나는 무늬까지 — 이 모두가 벌의 감각에 맞추어 정교하게 설계된 유인 장치다. 식물은 움직일 수 없다. 그러므로 자신의 꽃가루를 옮겨 줄 존재를 반드시 불러들여야 했고, 그 대가로 꿀이라는 품삯을 지불한다.
탐하는 자는 사실 고용된 자였다.
나무의 계산.
이 계산은 꽃에서 끝나지 않는다. 과일은 왜 달고 붉은가. 나무가 짐승을 먹이려 자비를 베푼 것이 아니다. 씨앗을 멀리 옮기기 위해서다. 달콤한 과육은 운반비고, 소화되지 않는 단단한 씨앗은 화물이다. 짐승은 배불리 먹었다고 여기며 떠나지만, 실제로 이득을 챙긴 것은 제자리에 붙박인 채 후손을 산 너머로 보낸 나무다.
무화과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무화과 열매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 안으로 말려 들어간 꽃덩이이며, 오직 무화과말벌만이 그 좁은 구멍으로 들어가 수분을 마칠 수 있다. 말벌은 들어가는 과정에서 날개와 더듬이가 부러진다. 다시는 나오지 못한다. 그 안에서 알을 낳고 생을 마친다. 한쪽은 대를 잇고, 한쪽은 목숨을 지불한다.
기만은 더 노골적일 때도 있다. 어떤 난초는 암벌의 형태와 냄새를 흉내 낸다. 수벌은 짝인 줄 알고 달려들어 헛되이 몸을 부빈다. 꿀은 단 한 방울도 없다. 꽃가루만 잔뜩 묻힌 채 날아가서, 다음 난초에게 같은 짓을 반복한다. 속은 자는 끝까지 자기가 탐한 줄 안다.
잊는 자가 심는다
그런데 자연에는 이보다 한층 기묘한 계약이 있다. 상대의 능력이 아니라 상대의 결함을 밑천으로 삼는 계약이다. 다람쥐와 청설모는 가을이면 도토리를 물어다 땅에 묻는다. 한곳에 쌓아 두지 않고 수백 군데에 하나씩 나누어 묻는다. 이를 산포저장이라 한다. 도둑맞을 위험을 흩어 놓는 영리한 방식이다. 실제로 그들은 묻어 둔 것의 대부분을 되찾는다. 냄새와 지형의 기억을 함께 쓰기 때문에, 흔히 말하듯 건망증이 심해서 못 찾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아무리 영리해도 전부를 되찾지는 못한다. 눈이 덮이고, 낙엽이 쌓이고, 겨울을 넘기지 못한 짐승도 있다. 그렇게 주인을 잃은 도토리들이 이듬해 봄 싹을 틔운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그 남겨진 몫이 사고가 아니라 나무가 미리 치른 값이라는 사실이다.

참나무는 다람쥐에게 먹이를 나누어 주려고 도토리를 맺는 것이 아니다. 다람쥐가 얼마를 먹고 얼마를 잊을지를 셈에 넣고, 잊힐 만큼을 더 만든다. 몇 해에 한 번씩 온 산의 참나무가 약속이나 한 듯 도토리를 쏟아붓는 해가 있다. 결실주기라 부른다. 흉년으로 짐승의 수를 미리 줄여 놓았다가, 풍년에 도저히 다 먹어 치울 수 없는 양을 한꺼번에 내놓는 것이다. 반드시 남게 만들기 위해서다. 나무는 짐승의 식욕을 이기려 하지 않는다. 식욕을 계산에 넣어 넘어서 버린다.
산 정상 근처, 흙도 변변찮은 바위틈에 관목이 아닌 아름드리나무가 서 있는 광경도 이 계약의 산물이다. 다만 그 높이까지 씨앗을 나른 것은 다람쥐가 아니라 새다. 어치는 도토리를 부리에 물고 일 킬로미터 넘게 날아가 흙에 꽂아 둔다. 빙하가 물러간 뒤 참나무 숲이 북쪽으로 퍼져 나간 속도는 바람으로도, 다람쥐의 걸음으로도 설명되지 않는다. 오직 어치의 날개로만 설명된다.
더 극적인 것은 잣나무와 잣까마귀다. 눈잣나무의 솔방울은 저 혼자 벌어지지 않는다. 씨앗에 날개도 없다. 바람에 실릴 수도, 저절로 떨어질 수도 없게 만들어져 있다. 오직 잣까마귀의 부리만이 그것을 열 수 있다. 새는 목주머니에 수십 개씩 담아 몇 킬로미터를 날고, 능선과 바위틈 수천 곳에 나누어 묻는다. 한 마리가 한 해에 삼만 개 넘는 씨앗을 옮긴다. 그중 찾지 못한 것들이 바위 사이에서 나무가 된다. 이 나무는 이동의 수단을 스스로 버린 종이다. 날개를 포기하고, 대신 남의 기억에 자기 미래를 맡겼다. 그리고 그 기억이 완전하지 않으리라는 데에 종의 존속을 걸었다.
생각해 보면 아찔한 도박이다. 만약 잣까마귀가 완벽한 기억력을 가졌다면, 삼만 개를 묻고 삼만 개를 모두 찾아냈다면, 그 숲은 한 세대 만에 사라졌을 것이다. 그리고 숲이 사라지면 잣까마귀도 사라진다. 완전한 기억은 양쪽 모두의 자멸이다.
자연은 어느 쪽에게도 완벽을 허락하지 않음으로써 둘 다를 살렸다.
우리는 망각을 결함이라 부른다. 잊지 않으려 적고, 찍고, 저장한다. 그러나 산의 이치로 보면 망각은 결함이 아니라 씨앗을 산 너머로 보내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다람쥐는 제 겨울을 위해 묻었을 뿐인데, 그가 잊은 자리마다 숲이 섰다. 심을 뜻이 없었던 자가 심었고, 심을 뜻이 없었기에 심을 수 있었다.
붉은 입술
사람의 세계로 건너오면 이야기는 조금 조심스러워진다.
붉은 입술과 발그레한 뺨이 시선을 붙드는 데에는 생물학적 내력이 있다는 설명들이 있다. 붉은 기운은 피가 잘 도는 상태, 곧 젊음과 건강의 신호로 읽힌다는 것이다. 화장이란 그 신호를 붓으로 다시 그려 넣는 일이라고. 꽃이 꿀샘 둘레에 무늬를 그려 넣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해석이다.
그러나 여기서 걸음을 멈추면 그것은 절반의 이야기, 그것도 게으른 절반이다.
사람의 화장을 짝짓기 신호 하나로 환원하는 것은 벌과 꽃의 비유를 너무 멀리 끌고 간 것이다. 여인이 거울 앞에 앉는 이유는 하나가 아니다. 누군가를 부르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스스로를 다잡기 위해서, 세상에 나설 갑옷을 두르기 위해서, 오늘의 기분을 손끝으로 정하기 위해서, 그저 그것이 좋아서 앉는다. 회의장에 들어서는 남자가 넥타이를 고쳐 매는 마음과 다르지 않다. 남자의 넥타이는 품격이라 부르고 여자의 립스틱만 유혹이라 부른다면, 그것은 자연의 이치가 아니라 오래된 편견이다.
그러니 화장을 두고 물어야 할 질문은 “누구를 홀리려는가”가 아니다. 누가 이 게임에서 실제로 돈을 버는가이다.
진짜 수혜자
여기서 화살표를 다시 따라가 보자.
붉은 입술이 아름답다고 가장 크게 외치는 자는 누구인가. 사내도 아니고 여인도 아니다. 광고다. 화장품 산업이다. “당신은 그 자체로 소중합니다”라고 말하며 소중해지기 위한 물건을 파는 자들이다. 아름다움을 향한 욕망은 사람의 것이지만, 그 욕망이 흐르는 강바닥을 파 놓은 것은 자본이다. 벌은 꿀을 얻고 꽃은 대를 잇는 정직한 거래였는데, 여기서는 꿀을 파는 제삼자가 따로 있다.
자본이 욕망의 강바닥을 팠다면, 오늘날 가장 크게 피어난 꽃은 우리 손안에 있다. 값을 치르지 않고 쓰는 그 화려한 화면들. 무료라 했으니 우리가 손님인 줄 알았다. 그러나 값을 치르지 않는 자리에서 상품은 언제나 우리 자신이다. 스크롤을 내리는 손가락, 머무른 시간, 눌린 좋아요 — 그것이 꽃가루다. 우리는 재미를 탐한다고 믿으며, 실은 남의 밭을 수분하고 있다.
공짜는 없다
여기까지 오면 하나의 이치가 뚜렷해진다.
꿀은 품삯이었다. 달콤한 과육은 운반비였다. 무화과말벌이 받은 보금자리의 값은 제 목숨이었다. 도토리를 배불리 먹은 다람쥐는 그 대가로 온 산에 참나무를 심어 주었다. 자연에는 거저 주고받는 거래가 하나도 없다. 다만 청구서가 그 자리에서 날아오지 않을 뿐이다.
인간의 세상도 다르지 않다. 값이 없어 보이는 것일수록 값은 크고, 다만 늦게 청구된다. 그것도 대개 눈에 보이지 않는 화폐로 청구된다. 시간으로, 주의력으로, 습관으로, 판단력으로. 지갑에서 나가지 않았으니 우리는 지불한 줄을 모른다.
여기서 사실과 진실이 갈라진다.
사실은 이렇다 — 벌이 꽃을 찾아다닌다. 다람쥐가 도토리를 먹는다. 저 화면은 무료다.
진실은 이렇다 — 꽃이 벌을 부린다. 참나무가 다람쥐를 부린다. 무료인 자리에서 팔리는 것은 나 자신이다.
사실은 눈에 보이는 한 컷이고, 진실은 그 앞뒤로 이어진 긴 문장이다. 사실만 보는 눈은 언제나 요란하게 움직이는 쪽을 주인공으로 지목한다. 그래서 탐화봉접이라는 꾸짖음이 수백 년을 살아남았다.
벌은 눈에 띄게 날아다녔고, 꽃은 가만히 앉아 있었을 뿐인데.
노자는 말했다. 天網恢恢 疏而不失(천망회회 소이불실) — 하늘의 그물은 성글고 넓으나 놓치는 법이 없다. 셈이 즉시 맞아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여 셈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물코가 넓을 뿐이다. 자연의 장부는 계절 단위로, 때로는 세대 단위로 결산된다. 우리 눈이 그 결산일까지 따라가지 못할 뿐이다.
두 개의 화살표
세상의 모든 유혹에는 화살표가 두 개 있다.
하나는 욕망의 화살표다. 눈에 보이고, 시끄럽고, 이야기의 주인공 노릇을 한다. 벌이 꽃을 향해 날아가는 방향이다. 다른 하나는 이익의 화살표다. 조용하고, 대개 반대 방향을 가리키며, 아무도 그것을 세지 않는다. 꽃가루가 산을 넘어가는 방향이다. 옛사람이 탐화봉접이라 꾸짖었을 때, 그는 첫 번째 화살표만 보았다. 벌의 방탕을 나무라느라 꽃의 계산을 놓쳤다. 세상의 많은 훈계가 그렇게 만들어진다. 요란하게 움직이는 쪽을 범인으로 지목하고, 가만히 앉아 이득을 거두는 쪽은 풍경으로 남겨 둔다.
멀리 보는 눈
그러므로 문제는 시력이 아니라 시야다.
공자는 말했다. 人無遠慮 必有近憂(인무원려 필유근우) — 사람이 멀리 헤아리지 않으면 반드시 가까운 곳에 근심이 있다. 근시안이란 눈이 나쁜 것이 아니라, 지금 이 한 컷만을 전부라 믿는 마음이다. 한 컷만 보면 벌은 방탕하고, 다람쥐는 건망증이 심하고, 무료 서비스는 고마운 선물이다. 그러나 계절을 통째로 놓고 보면 벌은 일꾼이고, 다람쥐는 조림공이며, 선물은 청구서였다.

"人無遠慮 必有近憂(인무원려 필유근우) — 사람이 멀리 헤아리지 않으면 반드시 가까운 곳에 근심이 있다"
멀리 본다는 것은 미래를 점치는 일이 아니다. 하나의 장면을 앞뒤로 늘려서 보는 일이다. 이것은 누구에게서 왔는가. 이것은 결국 누구에게로 가는가. 지금 웃고 있는 자와 나중에 남는 자는 같은 사람인가.
이 훈련을 시켜 줄 스승으로 자연만 한 것이 없다. 자연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오히려 자연은 능청스럽게 속인다. 난초는 벌을 속이고, 과일은 짐승을 속이고, 꽃은 제 계산을 향기 뒤에 감춘다. 다만 자연은 끝까지 지켜보기만 하면 반드시 답을 보여 준다. 봄에 감춘 것을 가을에 드러내고, 한 세대에 감춘 것을 다음 세대에 펼쳐 놓는다. 인간의 세상은 그 결산을 흐려 놓지만, 산은 흐리지 않는다.
그러니 산을 보는 법을 배운 사람이 세상을 읽는다. 꽃 한 송이의 셈법을 이해한 사람은 광고의 셈법도 이해하고, 도토리 한 알의 행방을 끝까지 따라가 본 사람은 공짜라는 말 앞에서 한 번 멈추게 된다. 세상의 이치는 어렵지 않다. 다만 급한 눈에는 보이지 않을 뿐이다.
그러니 무엇이든 판단하기 전에 한 번은 물어야 한다.
누가 움직이는가. 그리고 누가 남는가.
누가 탐하는가. 그리고 누가 거두는가.
누가 잊는가. 그리고 그 잊은 자리에 무엇이 자라는가.
꽃은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가을이면 그 씨앗은 산 너머에 가 있다.
그리고 그 산 너머의 나무는, 잊혀진 덕분에 거기 서 있다.
“의미에서 가치로, 가치에서 미학으로, 미학에서 소통으로”
-萬頭(만두)의 객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