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득 코끝을 스치는 냄새가 까마득한 추억의 문을 열어줄 때가 있습니다.
운동장에서 놀다가 주워 온 나뭇잎을 부엌 나뭇간에 쌓아 놓으면, 어머니는 그 잎을 아궁이에 넣고 가마솥에 밥을 지으셨다.
천안중학교 교정이었다. 일곱 살 여덟 살 무렵이었으니 나는 그 학교 학생이 아니었고, 다만 그 마당이 놀이터였다. 플라타너스 잎은 손바닥보다 컸고 열매는 골프공만 했다. 그 열매로 서로 머리를 때리며 놀다가, 해가 기울면 잎을 한 아름 주워 안고 돌아왔다.
잎 타는 냄새가 아궁이에서 오르고 밥 냄새가 가마솥에서 내려오면, 두 냄새가 중간 어디쯤에서 만났다.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이 그렇게 좋았다.
이효석도 뜰에서 낙엽을 태웠다. 「낙엽을 태우면서」에서 그는 그 연기에서 갓 볶아낸 커피 냄새와 잘 익은 개암 냄새를 맡았다고 썼다. 죽은 잎이 타는 냄새를 살아 있는 것의 냄새로 옮겨 놓은 것이다. 그때 그의 마음에 일어난 것은 애상(哀傷)이 아니라 생활의 의욕이었다. 다만 그의 낙엽은 태우고 나면 재만 남았고, 나의 낙엽은 태우고 나면 밥이 되었다.
여기에 이미 한 가지 비밀이 들어 있다. <향기는 태워야 난다>. 침향(沈香)이 그렇고 백단(白檀)이 그렇고, 차를 덖는 잎이 그렇고 커피 열매가 그렇다. 온전한 상태로는 아무 냄새가 없다. 부서지고 볶이고 불에 닿아야 비로소 제 안에 감추어 두었던 것을 내놓는다. 사람도 다르지 않다. 한 번도 상해 보지 않은 인생에서는 향기가 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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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해서 내 집을 지을 때, 나는 그 타는 냄새를 기억하기 위해 언제나 벽난로가 있는 거실을 만들었다. 젊은 시절 운영하던 원두커피 전문점에도 벽난로를 들여놓고 늦은 가을부터 이른 봄까지 장작을 땠다.

'만두와 원두커피'. 벽난로를 들여놓고 늦은 가을부터 이른 봄까지 장작을 태우던 원두커피 전문점 시절의 시간은 따뜻한 온기와 타오르는 불꽃, 그리고 타닥타닥 타들어 가는 소리로 마음을 편안하게 채워주던 추억이다.
지금 생각하면 묘한 일이다. 이효석은 낙엽 연기에서 커피 냄새를 맡았는데, 나는 커피를 파는 자리에 장작 연기를 들여놓았다. 그는 연기 속에서 커피를 찾았고 나는 커피 속에 연기를 두었으니, 방향만 반대일 뿐 같은 것을 그리워한 셈이다.
타닥타닥 나무 타는 소리와 냄새를 맡으면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어린 시절 어머니가 태우시던 나뭇잎 냄새가 난다. 좋은 냄새의 기억은 추억을 소환하는 묘한 마법을 가지고 있다. 후각(嗅覺)은 인간의 감각 중에서 유일하게 사고(思考)를 거치지 않고 곧장 기억으로 들어간다. 눈은 판단하고 귀는 해석하지만, 코는 그냥 뚫고 들어온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을 오래 기억할 때 얼굴보다 냄새를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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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작가의 「메밀꽃 필 무렵」으로 가면 냄새의 성격이 달라진다. 달밤, 소금을 뿌린 듯한 메밀밭, 허생원이 평생 단 한 번 겪은 그 밤. 그런데 여기에 재미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실제 메밀꽃은 향기로운 꽃이 아니다. 가까이서 맡으면 비릿하다. 벌보다 파리가 먼저 꼬이는 냄새다.

'메밀꽃 필 무렵'은 인간 심리의 순수한 자연성을 허 생원과 나귀를 통해 표출하고 있는 낭만주의적인 소설이다. .
그런데도 우리는 그 대목을 읽으며 향기를 맡는다. 왜인가. <향기가 꽃에 있지 않고 기억에 있기 때문이다>. 허생원이 이십 년 동안 맡은 것은 메밀꽃 냄새가 아니라 그날 밤의 냄새였다. 대상은 비린데 기억은 향기롭다. 벽난로의 장작에서 어머니의 나뭇잎 냄새가 나는 것도 같은 이치다. 코가 맡는 것은 지금의 연기지만 마음이 맡는 것은 육십 년 전의 부엌이다. 이 소설의 결말은 끝내 확인되지 않는다. 동이가 왼손잡이라는 사실 하나만 놓고 끝난다. 재회도 없고 고백도 없다. 사실 왼손잡이는 유전되지 않으니 증거로는 허술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그 허술함이 요점이다. 허생원이 붙잡은 것은 증거가 아니라 믿고 싶은 마음이었다.
《향기는 확인되는 순간 사라진다》. 성분을 분석하고 이름을 붙이고 나면 그것은 더 이상 향기가 아니라 화학식(化學式)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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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목월의 「나그네」에는 술이 익어가는 마을과 저녁놀이 타오르는 하늘이 한 화면에 들어 있다. 익는 것과 타는 것이 나란히 놓인 셈이다. 여기서 세 번째 방식이 나온다. 《향기는 익어야 난다》. 술은 태우지 않는다. 항아리 속에서 조용히 제 몸을 바꿀 뿐이다. 불도 없고 연기도 없는데, 뚜껑을 열면 온 마을이 안다.
낙엽은 태워서 향이 되고, 메밀꽃은 시간이 지나 향이 되고, 술은 익어서 향이 된다. 사람도 이 셋 중 하나는 겪는다. 어떤 이는 타서 향기로워지고 어떤 이는 익어서 향기로워진다. 다만 아무 일도 겪지 않고 향기로워지는 길은 없다.
그리고 그 마을을 지나가는 사람은 나그네다. 술을 담근 이도 아니고 마실 이도 아니다. 지나가면서 냄새만 맡는다. 허생원도 장돌뱅이였고 이효석의 인물들도 대개 길 위에 있었다. 향기를 가장 잘 맡는 자리는 머무는 자리가 아니라 지나가는 자리인지도 모른다.

나그네는 정처 없이 떠도는 것이 아니라, "남도 삼백 리"라는 명확한 외줄기 길을 따라 걷는다. 무엇보다 그 발길은 "술 익는 마을마다" 타오르는 "저녁놀"의 향기를 쫓아 구름에 달이 가듯 유자적 하는 여행.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구름에 달 가듯이 간다는 그 나그네는, 정처 없이 흘러간 것이 아니라 술 익는 냄새를 따라 남도 삼백 리를 걸어간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는 떠도는 사람이 아니라 좇는 사람이다. 발이 간 것이 아니라 코가 간 것이다. 그렇게 보면 냄새는 뒤를 불러내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앞으로 끌고 가기도 한다. 어머니가 태우시던 나뭇잎 냄새가 평생 나를 벽난로 앞으로 데려다 놓은 것도 결국 같은 일이었다. 나 역시 냄새를 따라 걸어온 셈이다. 남도 삼백 리가 아니라 태평양 건너까지 걸어왔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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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가어(孔子家語)』에 이런 말이 있다.
> 與善人居 如入芝蘭之室 久而不聞其香 卽與之化矣
> 여선인거 여입지란지실 구이불문기향 즉여지화의
> 선한 사람과 함께 지내는 것은 지초(芝草)와 난초(蘭草)의 방에 들어가는 것과 같아, 오래 있으면 그 향기를 맡지 못하니 이미 그 향기와 하나가 된 까닭이다.
정작 향기로운 사람은 제 향기를 모른다는 뜻이다. 남의 냄새는 귀신같이 맡으면서 제 냄새는 못 맡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니 나에게서 무슨 냄새가 나는지는 결국 남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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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작품을 나란히 놓으면 답이 대강 나온다. 하나는 《태워야 난다》는 것이고, 하나는 《시간이 지나야 난다》는 것이다. 낙엽은 그 자리에서 타면서 커피 냄새가 되었고, 메밀꽃은 이십 년이 지나서야 향기가 되었다. 젊어서 좋은 향이 나는 사람은 드물다. 향수를 뿌린 것이지 향기가 난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서 나는 진짜 냄새는 대개 늦게 온다. 무엇을 잃어 보았는지, 무엇을 견뎠는지, 그것을 어떻게 태웠는지가 몸에 배어 나오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채근담(菜根譚)』은 이렇게 적었다.
> 濃肥辛甘非眞味 眞味只是淡
> 농비신감비진미 진미지시담
> 짙고 기름지고 맵고 단 것은 참맛이 아니며, 참맛은 다만 담박(淡泊)할 뿐이다.
향도 그렇다. 진한 향은 오래 가지 못한다. 곁에 있어야 겨우 알 듯 말 듯한 향이 십 년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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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말에 이런 것이 있다.

> 花香百里 酒香千里 人香萬里
> 화향백리 주향천리 인향만리
'꽃향기는 백 리를 가고 술향기는 천 리를 가지만,
사람의 향기는 만 리를 간다'
박목월의 그 마을에서 익던 술도 천 리를 갔을 것이다. 그러나 만 리를 가는 것은 사람이다.
나는 여기에 한 줄을 덧붙이고 싶다. 만 리를 가는 그 향기는 정작 제 코에는 닿지 않는다. 낙엽을 태우는 사람은 연기 한가운데 서 있어서 제가 무슨 냄새를 피우고 있는지 모른다. 냄새는 언제나 바람이 가는 쪽, 남이 서 있는 자리에서 맡아진다. 그러고 보면 그때 나는 내가 밥 짓는 데 한몫하고 있는 줄을 몰랐다. 그저 놀다가 잎을 주워 나뭇간에 쌓아 두었을 뿐인데, 어머니는 그것으로 밥을 지으셨다. 아이는 제가 무엇에 보태고 있는지 모르는 채로 보탠다.
어머니는 늘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너는 미국에 가서 살아라.
그 말씀이 나를 여기까지 데려온 것일까, 아니면 냄새가 데려온 것일까. 아마 둘은 같은 것이었을 게다. 낙엽 타는 냄새를 맡으면 아궁이 앞에 앉아 계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 냄새가 나에게 각인(刻印)시킨 것은 결국 한 가지였다. 여기는 안전한 자리다.

그래서 낯설고 물 선 땅에도 겁 없이 건너왔던 것인지 모른다. 냄새로 먼저 안전을 배운 사람은 낯선 곳을 덜 두려워한다. 어디를 가든 불을 피우고 그 앞에 앉으면 그 자리가 곧 부엌이 되기 때문이다. 내가 짓는 집마다 벽난로를 들인 것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나는 집을 지은 것이 아니라, 어머니가 계시던 자리를 옮겨 놓고 있었던 것이다.
어른이 되어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대개 제가 무엇을 태우고 있는지 모르는 채로 태운다. 다만 냄새는 남는다. 그리고 그 냄새는 언젠가, 아주 엉뚱한 자리에서 누군가의 유년을 불러낼 것이다.
그러니 물어야 할 것은 하나다.
**나는 지금 무엇을 태우고 있는가.**
萬頭(만두)의 객석 —
"의미에서 가치로, 가치에서 미학으로, 미학에서 소통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