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팬치, 인간, 언어와 사회성이란..
작성자 萬頭권두안
작성일 24-11-15 06:08
조회 572
댓글 1
본문
실상 침팬지란 대상을 두고 <언어성>을 논할 때, 그것이 언어학이란 전문영역이 아니라면 설득이나 이해를 구함에 있어 요구되는 논거를 따진다면 한 편의 논문 정도면 족하지 않을까 한다. 그렇다고 <원숭이가 무슨 말을 한단거야> 해버린다면 의미 부여 이전에 <반학문적>이어서 좋지않다.
그러니깐 막연히 왕따로 살다보니 또는 학교 다닐 때 공부드럽게 못해서 문자를 모르면 원숭이란 거야? 리고 반문 한다면 이 역시 초딩. 대화가 안된다. 꼭 그래서만은 아니지만 어찌되었건 논거를 받침할 사례를 통한 팩트는 짚고 넘어가야 한다.
왜냐하면 이 게시 공간은 언필칭(言必稱) 인문학과 자연, 사회과학의 관점을 언표(言表)로 삼고 있기 떄문이다. 아울러 명료한 결론을 유보하는 사색이나 고찰은 <철학>의 영역이지 결코 <과학>의 영역은 못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과연 인간은 침팬치 보다 지적능력이 압도적적으로 뛰어날까? 당연히 압도적이긴 하나 차원을 좀 달리하며 사회성 여부를 전제하여 본다라면 그 차이는 생각보다 크지는 않다. 인간이 원숭이들 보다 뛰어난 건 <언어>와 <문자>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살필 떄 만일 인간에게 언어와 문자가 없다라면 어떻게 되는건가? 대략은 알고 있지만 팩트 체크 차원에서 인터넷을 뒤져 보았다.
사례 펌) 1996년 나이지리아의 숲에서 네 살배기 아이가 발견됐다. 아이의 이름은 벨로. 생후 6개월에 버려져 2년 반이 넘도록 침팬지 손에서 자랐다.
발견 당시만 해도 벨로는 사실상 인간다운 모습을 거의 찾을 수 없었다. 태어났을 때만 해도 정상이었을 등뼈는 침팬지처럼 네 발로 걷던 습성 때문에 휘어서 바로 서지 못했고, 자연히 직립보행도 불가능했다.
또한, 뇌가 정상적으로 발달하지 못해 인간의 언어를 전혀 하지 못했다. 그저 침팬지처럼 소리 내고 행동할 뿐이었다. 야생 침팬지와 생활하며 침팬지의 모습을 보고 흉내 내며 자라온 벨로에게 인간 사회는 낯설고 이해하기 힘들었으리라. 실제로 벨로는 처음 발견되고 6년이 지난 2002년에야 나이지리아 카누시 보육원에서 다른 사람들과 생활하게 되었다.
하지만 10세가 된 벨로는 또래 아이들과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하루 12시간을 뛰어다니며 시도 때도 없이 손뼉을 치며 괴성을 질렀다.
뛰어다니지 않을 때는 흙을 집어 먹거나 열매를 가지고 놀았다.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기를 싫어하고 침팬지의 사진을 보여주면 침팬지 소리를 내며 반응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엄밀히 말해 벨로는 결코 침팬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과 전혀 어울리지 못하고 침팬지의 생활 습성을 고스란히 따라하는 벨로를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침팬지와 인간 사이의 어중간한 지점에 놓인 벨로의 사례에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이렇게 정의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이 말인 즉,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사회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아니라면 뇌용량이 크게 태어나도 원숭이의 범주 이상 상승 할 수가 없게된다..
그런 관점에서 살필 떄 만일 인간에게 언어와 문자가 없다라면 어떻게 되는건가? 대략은 알고 있지만 팩트 체크 차원에서 인터넷을 뒤져 보았다.
사례 펌) 1996년 나이지리아의 숲에서 네 살배기 아이가 발견됐다. 아이의 이름은 벨로. 생후 6개월에 버려져 2년 반이 넘도록 침팬지 손에서 자랐다.
발견 당시만 해도 벨로는 사실상 인간다운 모습을 거의 찾을 수 없었다. 태어났을 때만 해도 정상이었을 등뼈는 침팬지처럼 네 발로 걷던 습성 때문에 휘어서 바로 서지 못했고, 자연히 직립보행도 불가능했다.
또한, 뇌가 정상적으로 발달하지 못해 인간의 언어를 전혀 하지 못했다. 그저 침팬지처럼 소리 내고 행동할 뿐이었다. 야생 침팬지와 생활하며 침팬지의 모습을 보고 흉내 내며 자라온 벨로에게 인간 사회는 낯설고 이해하기 힘들었으리라. 실제로 벨로는 처음 발견되고 6년이 지난 2002년에야 나이지리아 카누시 보육원에서 다른 사람들과 생활하게 되었다.
하지만 10세가 된 벨로는 또래 아이들과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하루 12시간을 뛰어다니며 시도 때도 없이 손뼉을 치며 괴성을 질렀다.
뛰어다니지 않을 때는 흙을 집어 먹거나 열매를 가지고 놀았다.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기를 싫어하고 침팬지의 사진을 보여주면 침팬지 소리를 내며 반응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엄밀히 말해 벨로는 결코 침팬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과 전혀 어울리지 못하고 침팬지의 생활 습성을 고스란히 따라하는 벨로를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침팬지와 인간 사이의 어중간한 지점에 놓인 벨로의 사례에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이렇게 정의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이 말인 즉,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사회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아니라면 뇌용량이 크게 태어나도 원숭이의 범주 이상 상승 할 수가 없게된다..
위 벨로와 같이 태어나자마자 정글에 버려져 늑대나 침팬지 젖을 먹고 자랐다거나, 굴 속에 같혀 자랐다거나 하여 모든 사회적 생활성이 차단된 채 자라다가 구조된 예가 더러 있다. 그 경우 대개 지능이 낮았다. 의미인 즉, 언어와 문자, 그리고 사회생활이 인간의 지적능력을 상승시킨다는 것이다. 인간이 가진 지적능력의 대부분은 기억이며 기억은 모방에 토대를 둔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다른 사람의 행동을 모방하여 얻은 지식을 자신의 지적능력으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험한 적이 없는 낯선 상황에서는 천재도 어린이로 돌변할 수 있다란 것으로 받들일 수 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지적 능력은 <판단력>이다. 원숭이가 사냥꾼이 코코넛에 바나나를 감추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사냥꾼이 없을 때 훔쳐가는 능력은 학습된 지능이고, 그 상황에서 사냥꾼이 다가올 때 손에 쥔 바나나 놓고 도망치는 것은 판단력이다. 원숭이에게는 그 판단력이 없다한 것이고,.바나나를 쥔 손을 놓지 못해 딩힌다. 반면 인간은 비교적 높은 판단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 판단력은 대부분 학습된 경험을 반복 교육함에서 온다.
인간은 역사를 배웠으므로 과거의 일을 거울삼아 현재를 판단할 수 있게된다. 그런데 생전 처음 맞딱뜨리거나, 전혀 경험하지 못한 일을 당하게 되면 원숭이 비슷하게 판단의 영역이 흐려진다. 안타깝게도 인간 사회에도 생각보다 원숭이들은 적지가 않다. 정도의 차이 일 뿐.
하버드대학 나온 여자가 "임신 했을 때 꿈에 두꺼비를 자주 봐서 애기의 피부가 두꺼비 등짝처럼 이렇게 울퉁불퉁 해요 어쩌죠?" 하고 산부인과 의사에게 말한다.
낭패다.
낭패다.
캘리포니아 공인 법무사 권두안,JD
(월~토/ 9:30 am ~ 6:00pm)
213-995-7080 / duankwon@gmail.com
833 S Western Ave #36. Los Angeles, CA 90005
댓글목록 1
killjun님의 댓글
killjun
<정글북> 주인공 늑대 소년 ‘모글리’의 배경도
인도 어느 지역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라네요,
환경이 그 만큼 영향을 준다는,
인도 어느 지역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라네요,
환경이 그 만큼 영향을 준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