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한도의 재해석 — 당대 최고의 지식인도 착각할 수 있다
작성자 萬頭권두안
작성일 26-02-17 02:23
조회 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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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의 세한도, 그 안에 숨겨진 한 글자의 오류

추사 김정희는 제주도 유배 시절, 제자 이상적이 어렵게 구해 보내준 책에 깊이 감동하여 세한도(歲寒圖)를 그렸다. 황량한 유배지에서 모든 사람이 등을 돌린 가운데, 변함없이 스승을 잊지 않은 제자의 마음에 대한 고마움을 한 폭의 그림에 담은 것이다.
추사는 이 그림에 공자의 말씀을 빌려 “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也”(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야)라는 글귀를 적었고, 말미에 “長毋相忘”(장무상망)이라는 네 글자를 덧붙여 “오래도록 서로 잊지 맙시다”라고 썼다. 가장 추운 계절을 견뎌낸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르름에 둘의 우정을 빗대어, 그 우정을 영원히 존속하자는 간절한 바람을 남긴 것이다.
추사는 이 그림에 공자의 말씀을 빌려 “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也”(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야)라는 글귀를 적었고, 말미에 “長毋相忘”(장무상망)이라는 네 글자를 덧붙여 “오래도록 서로 잊지 맙시다”라고 썼다. 가장 추운 계절을 견뎌낸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르름에 둘의 우정을 빗대어, 그 우정을 영원히 존속하자는 간절한 바람을 남긴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 문장에서 당대 최고의 지식인도 착각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 글자의 문제를 발견한다.
‘凋’인가, ‘彫’인가

국보 김정희 필 세한도 ©국립중앙박물관
원래의 훈으로 보면 ‘凋’는 시들 조(조)다. 이 글자를 그대로 따르면 “가장 추위가 심한 세한을 지난 후에도 송백이 푸르름을 간직하다가 결국은 시든다”는 해석이 된다. 아무리 늦게 시든다 하더라도 결국은 시든다는 것이니, 이것이 과연 추사가 전하고자 한 뜻이었을까.

문제는 그림의 맨 마지막에 쓴 네 글자, 장무상망(長毋相忘)과의 관계에서 드러난다. 장무상망에서 ‘毋’(모)자는 단순히 ’없을 무(無)’가 아니다. 이 글자는 어미 ‘母’(모)자의 가운데를 위에서 아래로 한 획 그어 만든 것으로, 어미의 배를 가르는 짓은 차마 해서는 안 된다는 데서 비롯된 강렬한 금지의 뜻을 품고 있다. 그러므로 장무상망은 “오래도록 우정을 변치 말고, 서로 절대 잊지 맙시다”라는 절절한 다짐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앞의 글귀에서 ‘조’자가 ’시들 조(凋)’일 수가 없다. 시든다는 것은 결국 사라진다는 뜻이니, 영원히 잊지 말자는 장무상망과 정면으로 배치되기 때문이다.
‘조’자는 마땅히 **새길 조(彫)**가 되어야 한다. 조각하여 새기듯이 소나무와 잣나무가 푸르름을 영원히 간직하는 것처럼, 우리도 이 우정을 깊이 새겨 영원히 서로 잊지 말고 지냅시다 — 이것이야말로 세한도의 그림과 글귀, 그리고 장무상망이 하나의 맥락으로 관통되는 올바른 해석이다.
무비판적 수용의 위험
그러나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에 대하여 이 한 글자의 문제를 제기한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이것은 당대 최고의 대가가 쓴 글이라는 이유만으로 비판 없이 수용하려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의 사례가 또 있다. 공자의 논어 학이편(學而篇) 첫 구절,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에서 ‘說’자를 ’기쁠 열(悅)’로 해석하는 것이 그것이다. ‘說’자는 본래 ‘말씀 설’이다. 이를 본뜻대로 풀면 “배운 것을 수시로 익히면, 그 또한 남에게 설명할 수 있게 되니 기쁘지 아니한가. 그래서 멀리서 벗이 찾아오면 그 배운 것을 나누어 설명하게 되니 즐겁지 아니한가”가 된다. 앞뒤 문장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며, 배움이 소통으로 완성된다는 공자의 본 뜻이 비로소 온전히 살아나는 것이다.
선비의 책무
세상의 모든 것을 볼 때, 세심하게 분석하고 의문을 품는 태도는 선비라 불리는 지식인의 책무다. 권위 있는 이의 말이라 하여, 오래 전해 내려온 해석이라 하여,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습관은 시간이 흐르면서 그 뜻을 점점 더 원문에서 멀어지게 만든다. 한 글자의 훈이 달라지면 문장 전체의 의미가 뒤바뀌고, 그 뒤바뀐 의미가 수백 년간 정설로 굳어지는 것이다.
추사도, 공자의 원문을 옮기며 한 글자를 착각했을 수 있다. 위대한 지식인이라 하여 실수가 없을 수는 없는 법이다. 중요한 것은 그 실수를 발견할 수 있는 눈을 기르는 것이고, 발견했을 때 침묵하지 않는 용기를 갖는 것이다. 세한도 앞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새겨야 할 것은, 소나무의 푸르름 만이 아니라 한 글자도 허투루 보지 않는 선비 정신 그 자체일 것이다.
“의미에서 가치로, 가치에서 미학으로, 미학에서 소통으로”
-만두의 객석,권두안 J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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