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것들은 반드시 돌아온다.”
작성자 萬頭권두안
작성일 26-02-21 0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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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자필반(去者必返)
형이하와 형이상의 경계에서 아틀란티스를 읽다

바다는 기억한다.
인간이 망각한 것들을, 바다는 오래도록 품고 있다. 아틀란티스가 그랬다. 하루아침에 대서양의 파도 아래로 사라진 그 문명은,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인류의 집단 기억 속 어딘가에서 출렁이고 있다. 그것이 플라톤의 철학적 우화든, 실재했던 문명의 흔적이든, 그것이 지금도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아틀란티스는 여전히 살아있다.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보인다는 것은 무엇이며, 사라진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 아틀란티스를 이야기하려면, 우리는 먼저 이 질문 앞에 잠시 멈춰 서야 한다.
형이하(形而下): 눈에 보이는 것들의 세계
플라톤의 대화편 『크리티아스』에 묘사된 아틀란티스는 눈부시게 구체적이다. 붉은 돌과 흰 돌, 검은 돌로 지어진 신전. 황금과 전설의 금속 오리칼코스로 장식된 궁전. 육지와 바다가 동심원처럼 교차하는 기하학적 도시. 포세이돈의 후손들이 지배하던 그 대륙은, 분명히 형상을 가진 세계, 즉 형이하의 영역에 속한 존재였다.
형이하(形而下)란 『주역』의 언어로 “형체를 가진 것들의 세계 아래”를 의미한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현상의 영역이다. 아틀란티스의 황금 신전, 그 안을 가득 채운 인간들의 욕망과 웃음과 전쟁, 그리고 마침내 파도 속으로 잠겨들던 그 도시의 마지막 빛, 이 모든 것이 형이하의 세계에 속한다.
그러나 형이하의 세계에는 치명적인 속성이 있다. 그것은 반드시 변한다는 것이다. 불교는 이것을 무상(無常)이라 부르고, 헤라클레이토스는 “같은 강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고 말했다. 아틀란티스도 예외가 아니었다. 아무리 거대한 문명도, 아무리 단단한 황금 신전도, 형체를 가진 것은 형체를 잃는 순간을 피할 수 없다. 그것이 형이하 세계의 운명이다.
색즉시공(色卽是空): 사라짐의 진실
『반야심경』은 이렇게 선언한다.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형상이 있는 것(色)은 곧 비어있음(空)이요, 비어있음은 곧 형상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공(空)을 허무로 읽는 것은 오독이다. 공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것은 홀로 존재하지 않고 무수한 조건과 관계의 그물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연기(緣起)이며, 공의 본래 의미다.
아틀란티스가 바다에 잠긴 것은 색이 공이 된 사건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미 공이었던 것이 색의 옷을 벗고 본래의 자리로 돌아간 것이다. 그 문명을 이루던 돌과 금속과 인간의 숨결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흩어진 것이다. 파도의 일부가 되고, 해저의 침묵이 되고, 이집트 신관의 기억이 되고, 솔론의 여행 노트가 되고, 마침내 플라톤의 언어가 되어 2,400년을 건너 지금 이 자리까지 왔다.

우주에서 사라지는 것은 없다. 이것은 시인의 낭만이 아니라 물리학의 언어다. 에너지 보존 법칙은 말한다. 형태는 바뀌지만 총량은 변하지 않는다고. 아틀란티스의 에너지는 지금도 어딘가에 있다. 다만 우리의 눈이 그것의 새로운 형태를 알아보지 못할 뿐이다.
형이상(形而上): 보이지 않는 것들의 세계
형이상(形而上)은 형체를 가진 세계 너머, 눈으로 볼 수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것들의 영역이다. 플라톤의 언어로는 이데아(Idea), 불교의 언어로는 불성(佛性) 혹은 진여(眞如), 노자의 언어로는 도(道)라 부를 수 있는 그 것.
아틀란티스를 형이상의 시각으로 보면, 이 문명의 붕괴는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니다. 그것은 형이상의 질서, 즉 덕(德)과 도(道)로부터 이탈한 존재가 필연적으로 맞이하는 귀결이다. 플라톤은 분명히 말한다. 아틀란티스의 왕들은 처음에 신성한 본질을 지녔으나, 세대가 거듭될수록 인간적 탐욕에 물들었다고. 형이상의 근원에서 멀어질수록, 형이하의 화려함은 오히려 더 눈부시게 빛났지만, 그것은 붕괴 직전의 불꽃이었다.
이것은 동양 철학의 ‘박복(剝復)’ 원리와 정확히 일치한다. 주역의 박괘(剝卦)는 양(陽)이 극도로 쇠약해져 거의 사라지는 순간을 상징하지만, 그 다음 괘는 반드시 복괘(復卦), 즉 돌아옴이다. 무너짐은 돌아옴의 전제다. 아틀란티스의 침몰은 박괘의 순간이었고, 그것이 언제, 어떤 형태로든 복괘의 시간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은 우주의 리듬이다.
사건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
역사에서 우리가 우연이라 부르는 것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오랜 시간 쌓인 인과의 층위가 있다. 아틀란티스의 침몰도 그렇다. 하루아침의 재앙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세대를 거듭한 도덕적 침식, 욕망의 증식, 내부의 균열이 있었다. 겉으로는 우연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필연의 뼈대를 갖고 있다.


불교는 이것을 업(業, karma)이라 부른다. 업은 단순한 숙명론이 아니다. 행위가 씨앗이 되어 조건이 무르익으면 반드시 결실로 나타난다는 인과의 법칙이다. 아틀란티스가 하루아침에 잠긴 것은, 수백 년에 걸쳐 뿌려진 씨앗이 그 순간 한꺼번에 싹을 틔운 것이다. 우연이란 필연이 자신의 얼굴을 가리기 위해 걸치는 가면일 뿐이다.
이것은 비단 아틀란티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로마가 하루아침에 무너지지 않았듯, 모든 문명의 붕괴는 오랜 내부 균열의 결과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모든 문명의 부활 또한 오랜 침묵 속에서 조용히 준비된다.
문명의 책무: 기억의 전승
문명이 살아있는 생명체들의 자취와 흔적이라면, 그것은 단순히 건물과 제도의 집합이 아니다. 문명은 인간이 시간과 싸우며 쌓아온 의미의 총체다. 그리고 그 의미는 반드시 다음 세대로 전해져야 한다. 이것은 의무이기 이전에, 존재의 본능이다.
불교 유식철학의 **아뢰야식(阿賴耶識)**은 모든 경험과 행위가 씨앗으로 저장되는 심층 의식을 말한다. 개인이 죽어도 그 씨앗은 남는다. 문명도 다르지 않다. 아틀란티스가 물속에 잠겼어도, 그 문명의 씨앗은 이집트 신관의 기억 속에 살아남았고, 솔론을 통해 아테네로 건너왔으며, 플라톤의 언어 속에서 새로운 형태로 발아했다. 우리가 지금 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 자체가 그 거대한 전승의 연쇄에 참여하는 것이다.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요, 살아도 산 것이 아니라는 말은 여기서 빛난다. 아틀란티스는 형체로는 죽었지만, 의미로는 살아있다. 그것이 전하는 경고, 탐욕의 끝은 침몰이라는 그 메시지는, 2,400년이 지난 지금 오히려 더 선명하게 들린다.
찰나(刹那)와 영원: 존재 너머의 존재


아비달마 불교는 찰나를 인식의 최소 단위로 정의한다. 모든 존재는 매 찰나 생(生)하고 멸(滅)한다. 우리가 연속된 것으로 보는 현실은, 사실 수천억 번의 생멸이 빠르게 연속되는 것이다. 영화의 프레임 처럼.
이 시각에서 보면, 아틀란티스라는 문명도 우주적 시간 속에서 하나의 찰나였다. 그러나 그 찰나가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찰나는 영원의 일부이기 때문에, 아틀란티스의 찰나는 인류라는 거대한 의식의 강물 속에 영원히 흘러가고 있다.
형이하의 세계에서 보면 아틀란티스는 사라졌다. 그러나 형이상의 세계에서 보면, 그것은 형태를 바꾸었을 뿐이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의 그림자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는 것의 뿌리다. 형이하와 형이상은 서로 대립하는 두 세계가 아니라, 하나의 실재가 드러나는 두 가지 방식이다. 존재 너머의 존재. 그것은 멀리 있지 않다. 사라진 것들 안에, 바다의 침묵 안에, 그리고 우리가 망각한 기억의 깊은 곳에 언제나 있었다.


바다는 지금도 기억한다.
아틀란티스를. 그리고 우리가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수많은 문명들을. 때가 되면, 그것들은 어떤 형태로든 다시 세상으로 나올 것이다. 우주에서 사라지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찰나에 살고 찰나에 죽지만, 그 찰나들이 모여 만드는 강물은 영원히 흐른다.
색(色)이 공(空)으로 돌아가고, 공이 다시 색으로 피어나듯이.
“의미에서 가치로, 가치에서 미학으로, 미학에서 소통으로“
-만두의 객석,권두안J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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