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의 뿔과 주인의 자리
작성자 萬頭권두안
작성일 26-02-22 11:12
조회 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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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나는 누구인가
사람은 길 위에 선 존재다.
태어나면서부터 우리는 이미 어디엔가 놓여 있다.
국가, 시대, 가정, 환경.
그것들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위에서 어떻게 서 있을 것인가는
끝내 나의 몫이다.
불교 경전 **숫타니파타**에는 짧지만 강렬한 구절이 반복된다.
〈코뿔소의 뿔 경〉, 곧 **Khaggavisāṇa Sutta**에서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가라.
그 말은 냉혹하다.
그러나 동시에 자비롭다.
혼자 가라는 것은 세상을 등지라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의 소음에 매달리지 말라는 뜻이다.
바람에 걸리지 않는 그물처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라

집착과 공포에 묶이지 말라는 경계다.
무소의 뿔은 곧다.
휘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타인의 박수에 기대지 않고,
비난에도 꺾이지 않는다.
그 뿔은 외로움의 상징이 아니라
자기 귀속의 상징이다.
⸻
선종의 가르침에는 이런 말이 있다.
당나라의 선승 **임제의현**의 어록에 전해지는 구절이다.
隨處作主 立處皆眞
수처작주 입처개진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되면
서 있는 곳마다 모두 참이 된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가는 사람은
결코 도망자가 아니다.
그는 어디에 있든 그 자리의 주인이 된다.
직장이든, 가정이든,
법정이든, 시장이든,
유리한 조건이든 불리한 조건이든,
그는 환경의 결과물이 아니라
환경을 해석하는 존재가 된다.
주인이 된다는 것은 지배한다는 뜻이 아니다.
책임진다는 뜻이다.
변명하지 않고,
남을 탓하지 않고,
스스로 의미를 세우는 것.
그때 비로소
서 있는 그 자리가 ‘진(眞)’이 된다.
⸻
옛사람은 또 이렇게 말했다.
地不長無名之草(지부장무명지초)
天不生無祿之人(천불생무록지인)
땅은 이름 없는 풀을 기르지 않고,
하늘은 녹(의미)없는 사람을 낳지 않는다.
이 말은 운명의 특권을 약속하는 문장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존엄에 대한 선언이다.
우리는 의미 없이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
문제는 의미가 주어졌는가가 아니라,
그 의미를 발견하고 창조했는가이다.
풀이 이름을 얻는 것은
스스로 뿌리를 내릴 때다.
사람이 녹을 얻는 것은
스스로 역할을 감당할 때다.
⸻
나는 누구인가.
나는 타인의 평가 속에서 만들어진 그림자인가,
아니면 스스로 선을 긋는 화가인가.
나는 환경에 적응하는 생물에 머무는가,
아니면 환경을 재구성하는 인간인가.
적자생존(適者生存)
강한 것이 살아남는 것이 아니다.
생물은 환경에 적응하는 자가 살아남는다.
그러나 인간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적응을 넘어 재창조한다.
의미를 부여하고, 질서를 세우고,
혼돈 속에서 세계를 짓는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간다는 것은
타인의 허락을 기다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수처작주한다는 것은
지금 이 자리에서 시작한다는 뜻이다.
지부장무명지초, 천불생무록지인은
나의 존재를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경고다.
⸻
결국 질문은 밖이 아니라 안에 있다.
나는 내 삶의 주인인가.
내가 서 있는 이 자리는
타인의 세계인가,
아니면 내가 세울 세계의 터전인가.
누군가는 세상을 탓하며 늙어가고,
누군가는 같은 세상에서
자기 세계를 세운다.
세상은 동일해도
세계는 다르다.
세계는 해석과 책임 위에 세워진다.
무소의 뿔처럼 중심을 세우고,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되어 서 있을 때,
나는 더 이상 질문 속의 존재가 아니다.

그 때 비로소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하나의 문장이 아니라
하나의 삶이 된다.
나는 우연히 세상에 온 것이 아니다. 반드시 필연으로 온 것이다.
하지만,
나는 미완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나의 의미를 시작하는 존재다.
“의미에서 가치로,가치에서 미학으로,미학에서 소통으로”
-만두의 객석,권두안J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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