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에서 가치로, 가치에서 미학으로, 미학에서 소통으로
  만두()의 인문학 이야기『객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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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있음에 대하여

작성자 萬頭권두안
작성일 26-02-28 02:33 | 246 | 0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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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지성,“지성인은 서구의 개념이다. 동양에는 군자(君子)라는 개념이 있다. 군자는 학문적 바탕 위에 인격적 수련을 더한 사람이다.겸손과 오만의 극한에서 정상을 찍고 온 사람이기도 하다. 소동파의 문장과 시형식인 전범(典範모델) 의하면 참된 군자는 불교 승려나 도교의 도사들과도 교유하여야 하고 예술에 대해서도 일가견이 있어야 한다. 이는 편협하기 짝이 없는 서구의 창백한 지식인상과 명료하게 다른 부분이다.

 

서구의 지성인상이 강단이라는 시스템에 하부구조로 종속되어 있다면 동양의 군자상은 한 개인이 독자적으로 지적 네트워크를 형성한다. 강단이니 문단이니 하는 시스템에 소속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중심이 된다”-萬頭권두안-

 



흐르는 강물 앞에서 
 
헤라클레이토스는 말했다.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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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 of Ephesus)는
세상은 끊임없이 변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단순한 자연의 관찰처럼 들리지만, 이 한 문장 안에는 인간 존재의 근본 조건이 압축되어 있다. 강물은 흐른다. 내가 발을 뺀 그 순간, 방금 전의 물은 이미 저 멀리 흘러가 버렸다. 그리고 나 역시 변했다. 다시 발을 담그는 나는 조금 전의 나와 엄밀히 같은 존재가 아니다. 세계도 변하고, 나도 변한다. 고정된 실체는 없고, 오직 흐름만이 있다.
 
그런데 헤라클레이토스는 거기서 멈췄다. 그는 세계가 변한다는 것을 발견했지만, 그 변화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까지는 나아가지 않았다. 철학자는 강물을 가리켰고, 우리는 그 강물 앞에 서 있다.  그로부터 2,000여 년 뒤, 조선의 한 여인도 같은 강물 앞에 서 있었다. 

황진이는 청산벽계수(靑山碧溪水)에서 노래했다.
一到滄海不復還 일도창해부복환
 
“한번 넓은 바다에 이르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헤라클레이토스가 강물의 흐름에서 존재의 법칙을 보았다면, 황진이는 그 강물의 끝, 바다에서 돌아오지 않는 시간을 보았다. 그리스의 철학자와 조선의 시인은 서로를 알지 못했지만, 같은 진실 앞에 서 있었다. 흘러가는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이 전부다.

흐르는 강물 앞에서 두 가지 태도가 가능하다.
 
하나는 “어차피 다 흘러가니 허무하다”는 것이다.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고, 머물려 해도 머물 수 없다면, 무엇을 위해 애쓰는가. 이것은 허무주의의 강물이다. 그러나 다른 태도가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이 전부다.”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지금이 소중하다. 반복되지 않기 때문에 오늘이 유일하다. 흘러가기 때문에 깨어있어야 한다. 인생은 한 번 가면 돌아오지 않는다. 오늘 이 순간에 깨어있지 않으면 반드시 후회할 일이 생긴다. 매 순간 살아 움직이는 그 흐름 속에서 나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강물은 기다려 주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 〈빠삐용〉에는 서늘한 장면이 있다.
 
억울하게 살인 누명을 쓴 빠삐용이 재판관 앞에서 항변한다.
“저는 억울합니다. 살인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재판관은 그 억울함의 진위조차 따지지 않고 선고한다.
“너는 인생을 낭비한 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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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빠삐용, 탈출을 향한 용기와 고뇌 

이 말은 빠삐용 개인에 대한 심판이 아니다. 그것은 체제가 한 인간에게 내리는 구조적 낙인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선고는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본질적인 질문이 된다. 살았느냐 죽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살았느냐.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위해 존재했느냐. 재판관의 말은 예언이 아니라 도전장이 되었다. 빠삐용은 이후 수십 년에 걸쳐 포기하지 않고 탈출을 시도한다. 그 끈질긴 몸부림은 단순한 탈주가 아니었다. 그것은 “나는 인생을 낭비하지 않겠다”는 존재의 선언이었다.

나는 이 세상에 분명 이유가 있어 왔다고 믿는다.
 
우연히 던져진 존재가 아니라, 이 시간, 이 자리에 보내어진 존재. 그렇다면 주어진 시간을 무의미하게 흘려보내는 것은 단순한 게으름이 아니다. 그것은 나를 이 자리에 보낸 자에 대한 모독이다.
 
불교는 이것을 다른 언어로 말한다. 이 인연의 몸을 받아 태어난 것 자체가 이미 하나의 업(業)이라고. 존재는 이미 빚이다. 그 빚을 의미로 갚아야 한다. 헤라클레이토스의 강물도, 황진이의 창해도, 빠삐용의 감옥도, 결국 같은 것을 말하고 있다. 흘러가는 시간 앞에서 깨어있으라고.

2,300년 전 맹자는 이미 이것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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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將降大任於是人也, 천장강대임어시인야
必先苦其心志, 필선고기심지
勞其筋骨, 노기근골
餓其體膚, 아기체부
空乏其身, 공핍기신
行拂亂其所為, 행불란기소위
所以動心忍性, 소이동심인성
曾益其所不能。 증익기소불능
 
하늘이 장차 어떤 사람에게 큰 임무를 내리려 할 때는, 반드시 먼저 그 마음을 괴롭히고, 근육과 뼈를 수고롭게 하며, 몸을 굶주리게 하고, 하는 일마다 어긋나게 만든다. 이는 그 마음을 흔들어 깨우고 성품을 단련시켜, 본래 할 수 없었던 것을 능히 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고난은 형벌이 아니다. 그것은 하늘이 큰 사람에게 내리는 예비과정이다. 배고픔도, 실패도, 앞길을 막는 장벽도 — 그 모든 것이 나를 부수려는 것이 아니라 나를 키우려는 과정이다. 그러니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끈질기게 매달려야 한다. 그 어려운 과정을 온전히 통과한 사람은, 원래의 목표보다 더 큰 것을 손에 쥐게 된다.
 
빠삐용이 그랬다. 그는 탈출을 꿈꿨지만, 그 과정이 그를 자유 그 자체를 체현한 인간으로 만들었다. 목표는 수단이 되고, 과정이 인간을 완성시켰다.

강물은 지금도 흐르고 있다. 같은 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다. 일도창해부복환 — 한 번 바다에 이른 물은 돌아오지 않는다. 맹자의 하늘은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를 시험하고 있다. 그 시험 앞에서 무너지는 자와, 그것을 연단으로 삼는 자의 차이는 단 하나다.
 
깨어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그 물음 앞에 서는 것, 그것이 철학의 시작이고 삶의 시작이다.

흐름 속에 깨어있는 자만이, 흘러가지 않는 것을 남길 수 있다. 자신이 왔다갔음을 후세가 알 수 있는 것은 ‘흔적’을 남겼기 때문이다. 이 흔적은 생명체의 유전자가 되어 흐르고, 문명의 유전자가 되어 그 맥이 이어지는 것이 순리라고 믿어도 될 것이다.

-만두의 객석, 권두안 JD-

"의미에서 가치로, 가치에서 미학으로, 미학에서 소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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