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소설] 영원한 제국(개정판/영화자료 포함)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은 주리론(主理論)을 신봉하는 퇴계학파(남인)와 주기론(主氣論)을 신봉하는 율곡학파(노론)의 철학적 대립이, <붕당정치냐, 성왕정치냐> 하는 정치적 이상의 차이로 구체화되는 숙종조부터 정조조의 당쟁사를 다룬다. 이 소설은 정조 24년 1월 19일 하룻동안에 일어난 이야기다. 그러나 이 하룻동안의 이야기는 150년에 걸친 당쟁사의 주제와, 4천 년을 이어지는 동양적 이상국가의 환상을 보여주고 있다.
90년대 중반 쯤 일이다. 충무로의 어떤 영화사에 들렀다가 이 책을 우연히 얻었고,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나려고 한다. 쫏기는 자의 숨막히는 긴장감과 고스란히 독자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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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에 적혀있는 바를 증명할 길 없어 전전긍긍하던 ‘나’는 그것을 ‘소설’의 형식을 차용해 기록한다고 독자들에게 미리 양해를 구하며 소설 속의 소설이 시작된다. 주인공인 ‘이인몽’은 아내와 승경도놀이를 하던, 행복했던 한 때를 회상한다.
인몽은 규장각의 대교로서 아내 ‘상아’와 11년의 결혼생활을 끝으로 협의 이혼한 상태이다. ‘상아’가 나라에서 금지하고 있는 서학의 천주교도였기 때문이다. 가문의 멸화를 막기 위해 협의 이혼은 당시 사대부 사회에선 비일비재한 일이다.
소설적 사건의 발단은 규장각 서고의 숙직을 서던 검서관 장종오가 급사하면서 시작된다. 인몽은 조정의 거의 모든 실권을 쥐고 있던 노론벽파가 사건을 맡기보다 같은 남인인 정약용이 사건을 맡기를 바래 사람을 보내는데 정약용은 남인의 영수 채제공의 자제가 전날 노론 벽파의 계교에 휘말려 옥사에서 얼어 죽기 직전에 구해 영조가 남긴 밀지의 비밀을 듣게 된다.
한 편, 이 사건을 계기로 정조의 개혁에 브레이크를 거는 동시에 정조의 노론에 대한 공격을 역으로 되칠 방법을 다각도로 모색하는 노론 벽파의 영수 심환지와 그 일파들은 시시각각 정조의 동태와 정적인 남인들을 옭죄어 오는데...... 줄거리는 이 정도 해둬야겠다.
사실 줄거리를 요약하기가 매우 힘이 들고 또, 쉽게 요약될 내용도 아니다.
다만, 내가 받은 느낌과 인상적이었던 내용, 소설의 배경 등을 설명해보고자 할 뿐이다.
소설은 당대의 역사적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 이른바 조선시대의 황금기라 불리는 영. 정조 시대는 정치,경제,사회,문화적으로 이전의 시대와는 격을 달리할 수많은 개혁이 있었던 조선조의 르네상스기라고 일컫지만, 겉보기와는 달리 안으로 들어가면 위태로운 박빙여림(薄氷如臨)의 상황이다.
그 시대적 상황 중 정조 시대로 좁혀 들어간 소설은 누대로 누려온 기득권을 쥐고 정통성이 흔들렸던 임금을 위협하며 자신들의 입지를 세우고자 했던 노론벽파와 다양한 정치세력들을 통합하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던 정조. 이런 왕을 지지하며 정적인 노론벽파를 격파하려 절치부심(切齒腐心)하는 남인탕평파간의 첨예한 대립과 갈등, 질곡의 역사적 상황이 이 소설의 토양이다.
여기에 작자는 실제 역사적 인물의 이름을 직접 쓴다든지(정약용, 심환지 등) 혹은 유사하게 배치했으며, 당대에 일어났던 역사적 사실들(화성 건축 등)을 지문에 은근슬쩍 가미하는 등의 수고를 더해 소설적 장치 또한 역사적 사실과 거의 일치하게 다룸으로써 정확하고 사실적인 역사에 대한 고증을 보여주고자 했다.
소설의 궁극적인 주제는‘정조 독살설’이다. 작자가 어린 시절 친척집에서 들은 뒤 뇌리에 박혀버린 무섭고 슬픈 이야기다. 조선사에 있어서 가장 역동적이었다고 평가받는 정조 시대에 벌어진 개연성 높은 이 설은 노론벽파의 정적이었던 영남 남인‘이인몽’을 통해 조용히 그러나, 준열히 고발하고 있다. 그러한 이인몽의 독백은 작자 자신의 독백이며 다음 지문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전략) 지금까지 인간이 만든 나라는 하나밖에 없었다. 고대의 모든 나라들은 주(周)나라에 도달하려는 꿈이었으며 그 이후의 모든 나라는 주나라로 돌아가려는 꿈이었다...”
왕권 강화는 현대에 와서 민주주의의 반대 개념인 독재의 개념이지만 조선사회 자체가 이미 왕의 1인 지배 체제임을 감안했을 때 당시 강력한 왕권 확립을 통한 정조의 개혁 정치가 이루어졌더라면 정조 시대 100년 후 그것을 과감히 실현(메이지유신)했던 일본의 식민지로까지는 전락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화자의 추측은 실제 공노비 제도를 혁파한 정조의 개혁 정치를 돌이켜봤을 때 단순한 설득을 뛰어넘어 어떤 확신으로 와 닿는 대목이다.
소설은 1881년 1월의 어느 하루에 일어난 숱한 사건들로 숨 가쁘게 달리다가 정조(성군)를 그리는 인몽(영남남인)의 애달프고 한스러운 다음 고백으로 귀결된다.
“무릇 천지가 사람을 만든 것은 짐승과 달리하기 위함이라. 하늘의 마음 쓰심이 지극하여 사람에게 예의와 제도를 주셨으니 이는 불멸하는 천지에 명명백백하게 나타난 법령이다. 예의와 제도는 임금(君) 한 분에서 비롯되나니, 임금 한 분이 있어 하늘의 마음이 드러나고 땅의 법도가 세워지고 인간과 짐승이 갈라진다.......<후략>”
모처럼 가슴이 후련하고 교양이 충만한 역사소설을 하나 읽었다는 자부심과 함께 어떻게 된 일인지 한편으로는 가슴이 먹먹한 기분이 되어 책장을 덮었다.
※ 개정판 1996년9월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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