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
테네시 윌리엄스가 지어낸 이름이 아니었다. 1947년의 뉴올리언스에는 실제로 그런 전차가 다녔다. 블랑쉬 뒤부아는 이렇게 안내받는다. 욕망(Desire)행 전차를 타고, 묘지(Cemeteries)행으로 갈아탄 뒤, 엘리시안 필즈(Elysian Fields)에서 내리라고.
지명을 그대로 옮겨 적었을 뿐인데, 노선도가 그대로 인생의 도면이 되었다. 욕망에서 출발해 묘지를 경유해야 낙원에 닿는다. 순서를 건너뛸 방법은 없다. 윌리엄스는 이 노선을 발명한 것이 아니라 발견했다. 그가 그 이름을 고를 때, 거기엔 이미 이천 년이 쌓여 있었다. 그리스의 시인들이 죽은 영웅들이 쉬는 곳이라 부른 엘리시온에서, 파리의 샹젤리제로, 그리고 블랑쉬가 무너지는 뉴올리언스의 뒷골목으로. 이름은 그대로인데 내용물만 갈아치워졌다. 낙원은 언제나 그 시대의 결핍을 비추는 거울이었다.
2. 전차에는 종착역이 없다
볼프람 슐츠가 원숭이의 뇌에 전극을 꽂고 알아낸 것이 하나 있다. 도파민은 보상 자체가 아니라 예측과 실제의 차이에 반응한다. 기대하지 않은 것이 왔을 때 신호는 솟구치고, 기대한 만큼 받으면 잠잠하며, 기대보다 적으면 아래로 꺾인다. 이 말은 곧, 뇌가 만족을 저장하지 못하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뜻이다. 어제의 기쁨은 오늘의 기준선이 된다. 같은 자리에 머물기 위해 계속 달려야 하는 구조다.
라캉은 다른 언어로 같은 것을 말했다. 욕망은 결여에서 태어나고, 대상을 손에 넣는 순간 그 대상은 욕망의 대상이기를 그친다. 욕망은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이사한다.
노자는 이천오백 년 전에 이미 그 목록을 적어두었다.

'오색영인목맹(五色令人目盲)', 《도덕경(道德經)》 제12장에 나오는 구절.
과도한 감각적 자극과 욕심이 인간의 본성을 흐리게 한다는 경고를 담고 있다
"五色令人目盲 五音令人耳聾 五味令人口爽 馳騁畋獵令人心發狂(오색영인목맹 오음영인이롱 오미영인구상 치빙전렵영인심발광)" / 다 섯 빛깔은 눈을 멀게 하고, 다섯 소리는 귀를 먹게 하고, 다섯 맛은 입을 상하게 하고, 말달리며 사냥하는 일은 마음을 미치게 한다. — 『도덕경』 12장
눈이 머는 것은 빛이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다. 감각은 강도(强度)에 적응하지, 총량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러니 전차는 멈추지 않는다. 멈출 수 있게 설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3. 출구와 비상구는 다르다
여기서 익숙한 결론으로 미끄러지기 쉽다. 욕망을 버려라, 비우면 자유로워진다.
그러나 욕망을 버린다는 것은 전차에서 내리는 일이 아니다. 애초에 타지 않는 일이다. 그건 해법이 아니라 삶의 포기다. 아무도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면 밭을 갈 이유도, 자식을 기를 이유도, 시를 쓸 이유도 없다. 욕망은 병이 아니라 동력이다.
여기서 번역이 뜻밖의 힌트를 준다.
휴버트 셀비의 원제는 Last Exit to Brooklyn이다. Exit은 고속도로의 출구, 지나치면 되돌아올 수 없는 마지막 진출로를 말한다. 그런데 한국어판은 이것을 비상구로 옮겼다. 엄밀히는 오역에 가깝다. 그러나 이 오역이 원제보다 정확하다.
출구는 평소에 드나드는 문이다. 비상구는 평소에 쓰지 않는다. 불이 났을 때만 쓴다.
그러므로 건물에 비상구를 설치한다는 것은 나가겠다는 뜻이 아니다. 불이 날 수 있음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비상구는 건물을 부정하지 않는다. 건물이 계속 서 있게 해준다.
욕망도 그렇다. 문제는 욕망이 아니다. 욕망이 불로 번지는 순간에 나갈 문이 없다는 것이다.
4. 비상구의 세 가지 조건
소방법이 비상구에 요구하는 조건은 셋인데, 공교롭게도 그대로 마음에 적용된다. 하나, 위치를 미리 알아야 한다. 불이 난 뒤에 찾는 비상구는 비상구가 아니다. 연기가 차오르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평온할 때 미리 걸어가 봐야 한다. 나는 어디까지 가면 위험한가. 얼마를 잃으면 손을 떼는가. 몇 잔에서 멈추는가. 이 질문에 답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는, 위기 때가 아니라 평시에 이미 벌어져 있다.
둘, 잠겨 있으면 안 된다. 대형 참사의 기록을 보면 비상구가 없어서 죽은 경우보다 잠겨 있어서 죽은 경우가 많다. 관리 편의를 위해, 도난 방지를 위해, 누군가 문을 잠갔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되돌아갈 길을 스스로 봉쇄한 사람들이 있다. 다 걸었기 때문에, 이미 너무 왔기 때문에, 여기서 멈추면 지금까지가 헛되기 때문에. 매몰비용이라는 이름의 자물쇠다.
셋, 혼자만 알아서는 안 된다. 사람은 자기 집 화재를 가장 늦게 알아챈다. 남의 도박은 병으로 보이고 내 투자는 판단으로 보인다. 그래서 비상구는 반드시 남이 알고 있어야 한다. 나 대신 문을 열어 줄 사람, 지금 나가야 한다고 말해 줄 사람. 혼자 있는 사람에게는 비상구가 있어도 없는 것과 같다.
5. 오늘의 전차는 스스로 궤도를 깐다
윌리엄스의 전차에는 그래도 정거장이 있었다. 욕망을 지나면 묘지가 나오고, 묘지를 지나면 내려야 했다. 오늘의 전차에는 정거장이 없다. 무한 스크롤에는 바닥이 없고, 자동재생에는 끝 화면이 없다. 이것은 설계의 실패가 아니라 설계의 목표다. 종료 지점을 제거하는 데 세계 최고의 공학자들이 투입되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제 전차가 궤도를 깐다. 알고리즘은 내 욕망을 따라가는 척하면서 실은 다음 욕망을 미리 놓아둔다. 블랑쉬는 적어도 자기가 어느 전차를 탔는지는 알고 있었다. 우리는 그것도 모른다.
블랑쉬는 마지막에 낯선 이의 친절에 늘 기대어 왔노라 말하며 끌려 나간다. 그녀에게 비상구가 없었던 것이 아니다. 어느 문이 비상구인지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었을 뿐이다. 셀비의 브루클린 부두에서 무너져 간 사람들도 그랬다. 마지막 출구 표지판을 못 봐서 지나친 것이 아니다. 그것이 마지막인 줄 몰라서 지나쳤다.
6. 두 개의 문은 생김새가 같다
여기서 한 가지를 분간해야 한다. 문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옆으로 새는 문이다. 노선을 정직하게 타면 욕망 다음에 묘지가 온다. 무언가를 내려놓아야 하고, 무언가는 끝나야 한다. 그 경유지를 견디지 못한 사람이 여는 문이다. 여기서 멈추면 지금까지가 헛되므로 한 판 더, 한 잔 더, 한 번만 더. 지름길처럼 보이지만 실은 노선을 이탈하는 문이다. 다른 하나가 비상구다. 그침을 받아들이려고 여는 문. 여기까지가 내 정거장임을 인정하는 문.
문제는 두 문의 생김새가 똑같다는 것이다. 둘 다 급할 때 열리고, 둘 다 나가는 문이고, 열 때의 심정마저 비슷하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절박함. 그래서 겉모습으로는 거의 구별되지 않는다. 구별하는 기준은 문이 열리는 방향이 아니라, 그 너머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느냐에 있다. 옆문은 대개 더 센 자극을 약속한다. 잃은 돈을 만회하기 위해 판돈을 올리는 것, 관계가 끝났는데 바로 다음 사람을 찾는 것, 지친 일을 그만두지 못하고 더 큰 프로젝트를 맡는 것. 문은 열리지만 궤도는 그대로다. 다만 속도만 빨라진다.
비상구는 반대다. 문을 열고 나서 한동안 텅 빈 공간이 온다. 판을 접고 자리를 떠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 이별을 선언한 뒤 아무 대체도 구하지 않는 시간, 더 이상 그 일에 이름을 걸지 않기로 한 후의 공백. 그 공백을 견디려고 여는 문이 비상구다. 보상이나 대체물이 미리 준비되어 있지 않다. 지금 열려는 문이 어느 쪽인지 가늠하려면, 스스로에게 두 가지만 물으면 된다. 이 문을 열고 나서 이미 다음 보상이 준비되어 있는가. 그리고 그 보상이 없어도 잠시 빈 공간을 견딜 준비가 되어 있는가.
블랑쉬는 평생 문을 열고 나왔다. 벨 리브에서, 로렐에서, 호텔 방에서. 매번 살기 위해서라고 믿었지만 매번 옆문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녀가 통과한 문 너머는 낙원도 지옥도 아니었다. 정신병원이었다. 그러니 물음은 나갈 것이냐 말 것이냐가 아니다. 지금 여는 이 문이 어느 쪽이냐다. 문 너머에 또 다른 전차가 기다리고 있는지, 아니면 잠시 서 있어야 할 빈 플랫폼이 있는지를 묻는 일이다.
7. 누가 문을 잠갔는가
4장에서 비상구는 잠겨 있으면 안 된다고 했다. 그런데 문을 잠그는 손이 언제나 자기 자신인 것은 아니다.
세 작품의 이력을 나란히 놓아보자.
윌리엄스. 1951년 영화판은 헤이즈 코드와 가톨릭 품위군단의 압력 아래 만들어졌다. 앨런의 동성애가 지워졌고, 그 결과 블랑쉬가 왜 무너졌는지에 대한 설명 자체가 사라졌다. 결말도 스텔라가 스탠리를 떠나는 것으로 바뀌었다. 죄에는 벌이 따라야 한다는 규정 때문이었다.
셀비. 1966년 영국에서 외설 혐의로 기소되어 이듬해 유죄 판결을 받았다. 1968년 항소심에서 뒤집히기까지 이 년이 걸렸다.
마광수. 1989년 시집 『가자, 장미여관으로』, 1991년 소설 『즐거운 사라』. 1992년 10월 강의 도중 연행되어 구속되었고, 1995년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되었다. 교수직을 잃었다.
세 경우의 논리가 같다. 욕망을 그린 것이 곧 욕망을 조장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런데 여기에 역설이 있다. 검열은 욕망을 없애지 못한다. 욕망이 지나갈 정규 통로를 막을 뿐이다. 그러면 욕망은 사라지지 않고 옆문으로 나간다. 말할 수 있으면 검토할 수 있고, 검토할 수 있으면 어디쯤에서 멈춰야 할지 가늠할 수 있다. 말할 수 없게 만들면 그 모든 과정이 통째로 지하로 내려간다. 지하에는 표지판이 없다.
소방법이 비상구를 잠그지 말라고 하는 이유가 정확히 이것이다. 문을 잠근 사람의 의도는 대개 선하다. 도난 방지, 관리 편의, 풍기 문란 방지. 그러나 불은 의도를 참작하지 않는다. 마광수가 평생 되풀이한 명제 — 억압된 욕망이 병이 된다 — 는 노자의 知止와 정면으로 부딪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두 사람은 다른 층위를 말하고 있다. 노자는 스스로 내릴 역을 정하라 했고, 마광수는 남이 내 역을 정하지 못하게 하라 했다. 앞의 것은 자율이고 뒤의 것은 자유다.
자유 없는 자율은 복종이고, 자율 없는 자유는 순환선이다.
8. 지옥은 종착역이 아니라 순환선이다
낙원이 종착역이라면, 지옥은 종착역이 아니다.
지옥이 형벌인 이유는 뜨거워서가 아니다. 끝나지 않아서다. 시시포스의 형벌은 바위가 무거운 데 있지 않고 정상에서 다시 굴러떨어지는 데 있다. 탄탈로스는 물속에 서 있는데 목이 마르다. 물이 없어서가 아니라 입에 닿는 순간 물러나기 때문이다. 욕망이 도착하는 지옥이 정확히 그 모양이다. 매번 다른 역인 줄 알지만 같은 역이고, 매번 처음인 줄 알지만 몇 바퀴째다. 순환선에는 종점이 없으므로 내려야만 내릴 수 있다.
비상구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 있다. 종착역이 있는 노선이라면 기다리면 된다. 순환선에는 기다려서 도착할 곳이 없다.
9. 지지(知止)
블랑쉬는 정신병원으로 실려 갔다. 셀비의 부두에서 사람들은 부서졌다. 그리고 이 노선을 그린 작가들 가운데 하나는 작중인물이 아니라 자기 삶으로 그 끝에 닿았다. 마광수는 필화 이후 이십오 년을 견디다 2017년 세상을 떠났다.
여기서 한 가지는 분명히 해두어야 한다. 그를 무너뜨린 것이 욕망이었다고 말한다면, 이 글은 그를 가둔 논리를 그대로 되풀이하는 셈이 된다. 그는 욕망을 말했다는 이유로 문이 잠긴 건물 안에서 이십오 년을 살았다. 잠긴 것은 그의 문이 아니라 그가 갇힌 방의 문이었다. 그 잠긴 문 앞에서 그는 비상구를 말할 수 있는 마지막 사람 중 하나였다.
노자의 44장은 이 글의 결론을 이미 적어두었다.
知足不辱 知止不殆 可以長久 (지족불욕 지지불태 가이장구) / 족함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가히 오래갈 수 있다.
知足을 흔히 체념으로 읽는다. 그만 바라라, 주어진 것에 감사하라. 그러나 이어지는 知止가 그 오해를 바로잡는다. 그침을 안다는 것은 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어디서 내릴지를 아는 것이다. 전차를 타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내릴 역을 미리 정해두라는 말이다. 욕망이 인간을 태우고 달리는 것은 막을 수 없다. 그것이 인간이다. 다만 그 전차에 비상구를 하나 달아두는 일은 할 수 있다. 평소에 위치를 익혀 두고, 잠그지 않고, 누군가에게 알려 두는 것.
그리고 하나 더 있다. 남의 비상구를 잠그지 않는 것. 자기 문은 자기가 열면 되지만, 잠긴 문 앞에 선 사람은 아무리 알아도 나갈 수가 없다. 4장에서 말한 세 번째 조건이 여기서 다시 돌아온다. 비상구는 혼자만 알아서는 안 된다. 남이 알고 있어야, 그리고 남이 열어 줄 수 있어야 비로소 비상구가 된다.
불은 욕망에서 나지 않는다. 비상구를 잊은 자리에서 난다. 그리고 비상구를 잠근 자리에서는, 불이 나기 전에 이미 숨을 쉴 수가 없다.
내릴 역을 정해둔 사람에게만, 엘리시안 필즈는 제 이름값을 한다.
-萬頭(만두)의 객석 -
“의미에서 가치로, 가치에서 미학으로, 미학에서 소통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