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위자연(無爲自然)과 '나의 각도'에 대하여』
1. 물처럼
노자는 『도덕경』 8장에서 "가장 높은 선은 물과 같다(上善若水)"고 했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고, 사람들이 꺼리는 낮은 곳에 머문다. 그래서 도(道)에 가깝다. 노자 사상의 중심에 놓인 무위자연(無爲自然)은 이 물의 모습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흔히 무위를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 오해한다. 그러나 무위는 손을 놓는 것이 아니라, 욕심과 억지로 하는 일을 내려놓는 것이다. 자연(自然) 또한 산천초목이 아니라 '스스로 그러함', 곧 만물이 본래 지닌 결이다.
노자가 "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작은 생선을 굽는 것과 같다(治大國若烹小鮮)"고 한 것도 같은 뜻이다. 자꾸 뒤집으면 생선은 부서진다. 그러니 무위자연을 한 줄로 말하면 이렇다. 이치대로 흘러가게 두고, 행할 때에도 섭리를 거스르지 마라.
2. 학의 다리
"부경수단 속지즉우"(鳧脛雖短 續之則憂)는 장자의 사상에서 유래한 표현으로,
자연의 본성을 억지로 바꾸려 하면 오히려 문제가 생긴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를 직역하면 "오리의 다리는 비록 짧지만 늘이면 근심이 생긴다"라는 뜻이 된다.
장자는 이 가르침을 한 장의 그림으로 보여준다. 『변무(騈拇)』편에 이런 구절이 있다. 鳧脛雖短 續之則憂, 鶴脛雖長 斷之則悲 (부경수단 속지즙우, 학경수장 단지즙비) 오리 다리가 짧다고 이어 주면 근심하고,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잘라 주면 슬퍼한다.
오리의 다리는 짧아서, 학의 다리는 길어서 제각기 알맞다. 그것을 '고쳐 준다'며 손대는 순간, 선의는 폭력이 된다. 그런데 여기서 물어야 할 것이 있다. 학의 다리를 자르려는 사람은 왜 그것이 길다고 보았는가?
3. 자연스러움이라는 착각

우리는 무엇이 자연스럽다고 말할 때, 그것이 세상의 이치에 맞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정직하게 들여다보면, 자연스럽게 보인다는 것은 대개 나의 잣대에 맞는다는 뜻이다. 내 눈에 익숙하고 내 기준에 들어맞을 때, 우리는 그것을 '자연스럽다'고 부른다.
그렇다면 내 눈에 자연스럽지 않다는 이유로 학의 다리를 자르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나에게 어색한 것이 남의 눈에는 더없이 자연스러울 수 있다.
이치를 내 판단으로 따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타인의 판단도 존중한다면, 그가 보는 이치가 나와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4. 각도란 무엇인가
모든 것은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달리 보인다. 다만 여기서 각도란 눈의 위치만을 뜻하지 않는다. 내가 쌓아 온 지식, 지나온 경험, 몸담은 환경 — 이것들이 모여 나의 기준이 되고, 나의 각도가 된다.
같은 풍경을 보아도 건축가는 구조를, 농부는 날씨를, 시인은 빛을 본다. 우리는 세상을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각도를 통해 세상을 본다.
장자는 『제물론(齊物論)』에서 묻는다. 사람은 습한 곳에서 자면 병이 들지만 미꾸라지는 그렇지 않다. 사람은 나무 위에 살면 떨지만 원숭이는 그렇지 않다. 셋 중 누가 바른 거처를 아는가?
또 사람들이 절세미인이라 칭송하는 이를 보면 물고기는 깊이 숨고 새는 높이 날아간다. 누가 참된 아름다움을 아는가? 각자의 자리에서 보는 '자연스러움'은 모두 다르다.
5. 자기본위의 두 얼굴
모든 것을 자기를 기준으로 삼는 태도를 자기본위(自己本位)라 한다. 학의 다리를 자르는 사람은 학을 위한다고 말하지만, 실은 '내 눈에 길어 보인다'는 자기 기준을 들이댄 것이다. 노자가 경계한 인위(人爲)란 바로 이것이다.
나쓰메 소세키는 1914년 11월 25일 도쿄의 가쿠슈인(학습원) 보인회 강연
「나의 개인주의」(私の個人主義)를 통해 진정한 자기본위(自己本位)의 개인주의와 타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책임 있는 태도를 역설했다.
그러나 자기본위가 늘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나쓰메 소세키는 1914년의 강연 「나의 개인주의」에서, 남의 권위나 유행을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고 제 판단의 중심을 세우는 것을 자기본위라 불렀다. 다만 그는 한 가지 조건을 붙였다. 나의 자기본위를 존중받고 싶다면, 남의 자기본위도 똑같이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두 얼굴은 결국 하나로 만난다. 나의 본성을 지키되, 남의 본성은 자르지 않는 것. 오리는 오리대로, 학은 학대로 두는 것이다.
6. 더 높은 자리에서
장자는 『추수(秋水)』편에서 이렇게 말한다. "도의 관점에서 보면 만물에 귀천이 없다(以道觀之 物無貴賤)."
나의 각도를 버릴 수는 없다. 우리는 누구나 자기 자리에서 세상을 본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의 각도일 뿐임을 아는 순간, 우리는 한 걸음 물러설 수 있다. 그 한 걸음이 학의 다리를 자르려던 칼을 내려놓게 한다.
물은 그릇을 탓하지 않는다. 둥근 그릇에서는 둥글게, 모난 그릇에서는 모나게 담긴다. 그러면서도 물은 물이기를 그치지 않는다.
나를 지키되 남을 고치려 들지 않는 것, 이치대로 흘러가게 두고 행할 때에도 섭리를 거스르지 않는 것 — 그것이 무위자연이 오늘 우리에게 건네는 지혜일 것이다.
-만두(萬頭)의 객석, 권두안 JD-
"의미에서 가치로, 가치에서 미학으로, 미학에서 소통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