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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두의 객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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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주제련가

작성자 萬頭권두안
작성일 24-09-24 15:31 | 503 | 0

본문

누구의 주제련가? 누구의 주재련가?

-금강산 봉우리를 오선지에 옮긴 작곡가, 최영섭
발문 : 서러운 아름다움의 백미, 『그리운 금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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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금강산」은 탄생 순간부터 온 국민의 사랑을 독차지한 가곡이다. 입에서 입으로 알려진 명곡이 그 위용을 자랑하면서, 플라시도 도밍고 • 루치아노 파바로티 등의 음반에도 당당히 들어가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다니 어깨가 으쓱해진다.

그 세월이 어느새 60년이다. 한 주일 동안 하루 한 번 틀어주던 KBS ‘이 주일의 노래’에서 첫선을 보인 이래, 올해로 환갑을 맞이한 「그리운 금강산」, 앞으로도 영구히 애창되고 애청될 명곡이라 믿어마지 않는다. 하여, ‘서러운 아름다움’의 백미(白眉)로 꼽힐 가곡, 「그리운 금강산」 탄생 60주년이 가기 전에 작곡가 최영섭 선생의 음악인생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져보기로 한다.

어려서 한 공부는 가짜가 없다

작곡가 최영섭은 1929년 강화군 화도면에서 태어나, 인천중학교와 경복고를 거쳐 서울대 음대에서 작곡을 전공했다.

오스트리아 빈 국립음대 지휘과 수석교수에게 지휘법을 사사받았으며, 인천여중고, 인천여상, 이화여고, 한양대 음대, 상명대 음악과, 세종대 음악과에서 후진을 양성했다. 인천시문화상(1959), 경기도문화상(1961), 한국음악상(1996), 세종문화상(2001), 대한민국은관문화훈장(2009), 새얼문화재단가곡상(2010) 등을 수상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강화 길상초등학교에서 인천 창영초등학교로 전학을 온 최영섭은 처음으로 접한 오르간에 흠뻑 빠진다. 이어서 바이올린, 플루트, 클라리넷 등 다양한 악기를 두루 섭렵하며 음악세계를 탐험한다. 음악에 관한 한 그는 유독 욕심이 많았다. 
“어려서부터 어머니는 뭐가 되든 네가 하고 싶은 걸 하라고 하셨거든요.
 모친의 전폭적인 지지로 별 다른 어려움 없이 욕심껏 악기를 만진 그에게는 확실한 교육철학이 있다.

 “어려서 한 공부는 어떤 공부도 가짜가 없습니다. 무슨 공부를 해도 그 사람의 인생에 평생 기여를 합니다.”

아이가 원하는 것은 뭐든 시도해보게끔 허용한 모친의 열린 교육이야말로 천재작곡가 최영섭을 만든 일등공신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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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가 탄생시킨 불후의 명곡

1961년 남산에 있던 KBS 방송국에는 시인과 작곡가를 연계시켜, 새로 창작한 가곡을 방송하는 ‘이 주일의 노래’란 프로가 있었다. 당시 32세의 최영섭은 촉망 받는 젊은 작곡가로 발탁돼 실력을 인정받으면서 날로 인기가 상승하던 중 이었다. 
“「그리운 금강산」을 작곡하기 전날의 일입니다.
 제가 「동해의 노래」를 작곡해 방송국에 갖다주고 나오는 길에 KBS 직원이던 동요작가 한용희 씨를 만났지 뭡니까. 아 그런데 그분이 이러는 거예요. ‘최 선생, 낙동강, 백두산, 동해, 압록강 등등은 다 노래가 있는데 왜 유독 금강산 노래만 없는 거죠?’ 아차! 과연 그렇구나. 그 길로 인천으로 내려와 중앙동 신흥초등학교 옆에 살던 한상억(1915~1992) 시인을 헐레벌떡 찾아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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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급히 찾아온 까닭을 전하자, 한상억 선생은 두말도 않고 빼랍을 열어 꺼내주더란다. 마침 금강산에 대한 시를 써두었던 것이다. 부리나케 귀가한 최영섭은 밤새워 작곡에 매달린다. “금강산 봉우리를 오선지에 점으로 찍었어요. 높은 봉우리는 높게 낮은 봉우리는 낮게 점으로 찍어서 그걸 연결하다보니 절로 멜로디가 됩디다.”

일사천리로 진행된 「그리운 금강산」 탄생 스토리, 손발이 척척 맞은 명곡의 탄생이 혹시 하늘의 주재로 준비된 곡은 아니었을까, 합리적인 의심을 해본다.  



악보에 금강산 봉우리를 연상하며 점을 찍어 연결했다는 데서 뮤즈의 강림이 강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첫 소절에 얽힌 에피소드도 심상치 않다.


‘누구의 주제(主題)련가 맑고 고운 산’으로 알고 있는 가사가 실은 ‘누구의 주재(主宰)련가 맑고 고운 산’이었다고 한다. 처음 인쇄된 악보의 오타가 본래 뜻에서 그다지 어긋나지 않아 그대로 두었다고. 
각설하고, 「그리운 금강산」은 ‘아차!’라는 각성에서 시작된 불후의 명곡임에 두말할 여지가 없다 하겠다.

못갖춘 마디의 은유

남북 적십자회담이 한창이던 시절(1972), 「그리운 금강산」은 또 한 번의 수난을 겪는다. 2절 가사 ‘비로봉 그 봉우리 짓밟힌 자리’에서 
‘짓밟힌 자리’가 ‘예대로인가’로 바뀌고, ‘우리 다 맺힌 원한 풀릴 때까지’에서 ‘원한’이 ‘슬픔’으로, 후렴부분에서 ‘수수만 년 아름다운 산 더럽힌 지 몇 해’에서 ‘더럽힌’을 ‘못가본’으로 손을 봐 북한과의 신경전을 피해갔다.

당시는 가곡 하나도 원형대로 보존하기 어려운 게 이 땅의 현실이었다. 
「그리운 금강산」은 4/4박자, 못갖춘마디로 시작된다. 못갖춘마디의 의미를 분단된 현실에 대입하니 고개가 끄덕여진다. 우리 민족이 반으로 찢어져 완성형이 아니기에 그리움에 사무친 마음을 못갖춘마디로 은유한 게 아닐까 미루어 짐작해본다.

시인 조병화와 작곡가 최영섭의 「추억」 만들기

가곡 대중화에 크게 기여하고 온 국민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었다는 평가를 받는 최영섭. 그가 발표한 700여 곡의 작품 중 최고의 효자는 「그리운 금강산」이지만, 정작 그가 가장 좋아하는 곡은 「추억」이라고 한다.

「추억」에는 시인 조병화(1921~2003)와 작곡가 최영섭의 낭만적인 스토리가 인천 송도해변을 배경으로 서려 있기 때문이다. 
인천에서 서울로 통근을 하던 조병화와 통학을 하던 최영섭은 9세의 나이 차이에도 허물없이 어울렸다.


어느 날, 인천 송도해변에서 낙조를 바라보며 술을 마시던 조병화가 즉석에서 시를 지어 읊고, 최영섭은 그걸 받아 적었다. 그렇게 만든 곡이 ‘잊어버리자고/바다 기슭을 걸어보던 날이/하루/이틀/사흘……’ 로 시작되는 가곡 「추억」이다.


 인천 ‘표관’에서 피아노독주회가 있었는데 그 피아니스트한테 한눈에 반한 조병화가 개인적으론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여인을 짝사랑하는 심정이 절절한 곡이다. 그 심정에 동화된 최영섭은 바로 노래를 만들었다.

시인과 작곡가라는 환상의 조합이 두 사람에게 시너지 효과를 줘 더 끌렸을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그들의 시와 음악 사이에는 낭만적인 바다가 흔들리고 있었으니 금상첨화 아니겠는가?

금강산이 된 최영섭

“저는 「그리운 금강산」 덕분에 명성과 부를 얻었습니다. 한때 교가나 사가 작곡의뢰가 밀려들어 경제적으로 큰 도움이 됐습니다. 때문에 이젠 세탁소에 옷을 맡길 때 ‘최영섭’ 대신 ‘금강산’이라고 적습니다.하하.”

망백이 지난 연세에도 유머를 잊지 않는 음악인. 최영섭의 자녀 중에는 전설의 록 밴드 ‘들국화’의 작곡자이자 베이시스트인 최성원이 있다. 「그것만이 내 세상」 「매일 그대와」 「제주도의 푸른 밤」 등을 작곡한 아들이다. 아버지는 금강산, 아들은 제주도를 노래한 음악인 부자, 이젠 이들의 족적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기대할 일만 남았다고 하겠다. ■
 

 


<萬頭 권두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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